퍼온 글

다시 5.18이 오니

망우초 2016. 5. 16. 16:36

  다시 5 .18이 오니 "임을 위한 행진곡"을 놓고

  시끌벅적하는눈요.

  그게 뭐라고 그러는지들

  가사나 한번 음미해봅시다.

  * 누군가 쓴글을 옮깁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노래 듣기 

 

 

 

묘지로부터 거리로 퍼져나간 민중의 노래

 

사람들이 모여 부르는 노래는 많다. 하지만 그 자체로 역사가 된 노래는 많지 않다. 묘지와 거리에서 불린 노래가 있다. 윤상원과 박기순이란 남녀가 광주에 있었다. 둘은 가까웠고 ‘들불야학’을 함께 한 사이다. 대학을 다니다 노동현장으로 간 여인이 먼저 세상을 등졌고, 남자는 1980년 5월에 광주에서 시민군이 되어 싸우다 ‘국군’에 의하여 전사했다. 그리고 겨울에 노래 하나가 만들어진다.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 혹은 노래굿 ‘넋풀이-빛의 결혼식’을 위해서였다.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를 황석영이 노랫말로 바꾸고, 1979년 대학가요제에 영랑과 강진으로 참가해 은상을 받은 적도 있는 김종률이 곡을 썼다. 촛불의 눈물이 된 모든 이들을 위한 곡, ‘임을 위한 행진곡’의 탄생이다.

 

사료 상 최초의 녹음은 테이프 [넋풀이-빛의 결혼식](1982)으로, 광주에서 문화예술로 운동에 참여했던 연행예술운동패 사람들이 불렀다. 하지만 어떤 가수와 음반을 통하여 보급되었다기보다는 구전과 악보를 통하여 퍼져나간, 말 그대로 ‘민중가요’였다. 군사정권은 이 노래를 부르거나 아니면 잡혀가거나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을 주었지만, 사람들은 계속 불렀고 시나브로 거리의 노래가 되었다. 지금도 진보단체와 진보정당의 집회와 기념식은 국민의례가 아니라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민중의례로 시작한다. 2010년 광주항쟁 30주년 기념식에서 ‘방아타령’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삭제하려 했던 자들은 이 역사성과 상징성을 무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가장 많이 낯이 익은 ‘임을 위한 행진곡’의 얼굴은 결의에 찬 투쟁가이다. 노래패 꽃다지가 그렇게 노래했고, 바로 이 버전이 대표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2011년 11월에 꽃다지는 10년 만에 새 음반 [노래의 꿈]을 발표했다). 다른 편에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처럼 비장하고 아름답게 불러 음반에 실은 경우도 있다. 그러다가 세상이 좋아지자(?) 영화 [화려한 휴가]에 삽입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실은 2000년대에 들어 전혀 다른 색을 입고 다시 태어난 ‘임을 위한 행진곡’들이 많다. 2002 월드컵 응원앨범에 ‘님을 위한 행진곡’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에 놀랄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펑크 밴드 버닝 햅번이 느닷없이 방방 뛰는 펑크 송으로 만들어놓았는데, 치기라고 생각해버리면 오해이다. 그들은 꽤 괜찮은 펑크 뮤지션들이니까. 또, 2006년에는 음반 [아가미]에 하림이 민중성을 흥으로 해석하여 유럽 민속음악 풍으로 만들었고, 정재일이 새롭게 편곡해낸 ‘임을 위한 행진곡’이 담겼다. 특히 처연함을 자아내는 한대수의 걸걸한 음성과 장엄한 합창이 인상적인 버전이다. 또 5•18기념재단이 제작한 음반 [5월의 노래](2006)에선 허클베리 핀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격렬한 록으로 재탄생시킨 적이 있다. 이처럼 다양하게 변주되던 곡을 원작자인 김종률이 2008년에 음반 [님을 위한 행진곡]을 발표하여 곡이 지닌 본래의 아름다움을 확인시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