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글

남도기행/ 무안, 영광 길을 걷다

망우초 2016. 7. 26. 14:30

 

 

 

                        남도기행/ 무안, 영광 길을 걷다 

 

 

 大暑中伏을 코앞에 두고, 전주지회 회우 22명은 폭염 속에

남도 일대를 답사했다지난달 예정했던 나들이가 천기의 짓궂음으로

어렵게 되자 719일 급기야 코스를 변경해 남도 행을 택한 것이다.

  장마기간 임에도 나들이 하는 날 우리에게 청명한 날씨를

내려 주심은 대단한 홍복이었다. 그래서인가 회우들은

전세버스에 오르면서부터 서로들 덕담을 나누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기력이 점차 떨어지고 우중충한

날씨 속에 집안에만 있다가 바깥 바람을 쐬러 간다니 잔잔한

설렘도 일었음이라.

  창밖에 보이는 산야는 그야말로 녹음방초! 신선하고 청초한

자연의 참 모습이다. 엊그제 모내기가 한창이었던가 싶더니

어느새 벼는 자라 땅심을 받고 진초록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동안 농부의 손놀림이 얼마나 분주하게 움직였을까를

생각하며 목례를 하는 여유도 부려본다.

 

 

 

  우리의 나들이 첫 코스는 전남 무안, 回山白蓮池. 넓이가

33동양최대 연 방죽이다. 그 규모와 잘 가꿔진 공원 시설물,

깨끗한 주변 환경에 우리는 그만 압도당하고 만다. 이 광대한

연 방죽에 그윽한 蓮香이 바람결에 코끝을 간지럼 태우고

하얀 연꽃이 활짝 폈을 때를 한번 상상해보라. 연꽃의 향연은

장관을 이룰 것이다. 하지만 피어나야 할 연봉오리가

게으름을 핀 탓인가 우리 일행이 너무 일찍 온 것인가 아직 꽃이

드문드문 피고 있어 만개의 참맛은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초록

이파리 위에 희디흰 빛깔로 피어난 순백의 연꽃을 보고 시인들은

시심을 저버릴 수 없었나 보다.

 

 

오세영 시인의 연꽃이란 시가 생각난다.    

     불이 물속에서 타오를 수 있다는 것은

     연꽃을 보면 안다.

     물로 타오르는 불은 차가운 불,

     불은 순간으로 살지만

     물은 영원을 산다.

한 송이 연꽃이 그냥 피어나는 것이 아니더라는 시인의 음성 같다.

 

  다음 달 초순경에야 만개한 백련의 절정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이곳 문화해설가의 귀띔이다그 아쉬움을 대신하는 것인지. 바로

옆에 있는 수련 공원이 여기가 진짜 연꽃 방죽인대요! 하며 갖가지

연꽃을 활짝 피워대고 있었다.

 

  수련과 홍연, 가시연, 개연 아라연 등 희귀수련이 온 방죽을 덮고

있었고, 생태연못의 조경과 공원 거리공간에 화분연꽃도 운치 있게

잘 배치되어 있었다. 백련이 만개 할 때쯤 이곳을 다시 찾으리라

다짐을 하며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무안의 따가운 햇볕은 대기를 달궈 섭씨 32도를 웃돌게 하고 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 우리는 짚불구이라는 생소한 돼지구이 식당을 찾았다.

자천 타천 식도락가(?)이며 문화해설가이기도한 김남규 지회장의

안내로 우리는 무안군 몽탄면의 한 음식점에 자리를 잡았다.

  짚불구이가 어떻게 만들어져 나오는가 모두가 의아해하면서 한참을

기다리니 접이식 적쇠에 얇게 썰어진 구은 돼지고기가 나왔다.

4인상에 적쇠 네 개가 나온 걸 보니 일인당 한 개씩 량인 셈이다.

 

 

 

꼬들꼬들하게 잘 구은 고기는 맛났다. 냇내만 나지 않았다면 임금님

진상품이 되고도 남았을 텐데...

  볏짚 냇내를 맡으니 옛 고향집 생각이 난다. 비산비야인 유년 시절의

고향집은 마땅히 땔감이 없는 터라 때가되면 부엌에서는 늘 냇내를

풍겨댔다. 땔감은 볏짚부터 콩대, 보릿대, 수숫대 같은 농산 부산물이

고작였으니 그 시절 우리네 부모 들은 세끼 때마다 얼마나 밥 짓는데

어려움을 겪었을까를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겁다.

  식사를 끝내고 한담을 하며 주변을 살피니 마을 앞뒤의 풍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영산강을 가로질러 면세가 이뤄진 夢灘고을은

꿈길 같은 여울, 여울진 꿈속 마을. 뭐라 이름 붙여도 그저 아름다운 강촌이다.

 

 

 

  몽탄에는 볼거리도 많다. 우리는 이웃에 있는 무안군 몽탄면 출신

옥만호 공군참모총장을 기념하기위해 건립된 호담항공우주전시관을 찾았다.

이 전시관은 옥만호 대장이 퇴직하면서 항공기나 항공부품들로 쓸모없이

고철로 버려질만한 전투기와 수송기 등 항공기와 평소 소장했던 항공관련

물품들을 한군데 모아 다듬고 정비한 귀한 자료들이다. 전시물 대부분은

한국전쟁 때, 혹은 월남전, 해방 전후, 일제강점기 등의 항공자료들이었다.

  난생 처음 항공기 내부 조종석도 살펴봤다. 조종실에는 4~5십 개의 계기판이

좌우상하 벽에 부착되어있고 몇 개의 조종석 클러치도 눈이 띠었다. 현대 항공기야

어느 기종 가릴 것 없이 디지털에 자동화로 되어있지만 그때 제품은 모두가

아날로그에 수동식이었으니 복잡다단한 항공기 조종사의 고충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를 실감케 했다.

 

 

  

   자료 전시물에는 원폭이 투하된 히로시마의 폐허 모습 사진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폐망한 일본이 저렇게 성장해서 자위대를 전투 병력으로 바뀌자는

평화헌법 개헌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니 그들의 침약야욕은 어디까지 갈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게 현 주변국제 정세다. 그래서일까 이 지역 주민들은

옥만호 장군의 호국, 애국, 애향정신 업적에 칭송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무안의 답사지역 백미는 초의선사기념관. 草衣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 심향면 왕상리가 그의 탄생지이기 때문이다. 초의는

秋史 김정희와는 1786년생 동갑내기이고 24년 선배 다산 정약용과는

스승과 제자사이로 그들의 교류는 대단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초의는 다도를 정립 집대성한 茶聖으로 알려진 것 외에도 추사와

詩文, 書畵를 함께했으며 대흥사 일지암에 머물러 있을 때는

휴정 서선대사와 함께 승병을 일으켜 왜병과 싸우는 등 구국활동을

벌여오기도 했다.

 

 

 

  이박에도 초의는 한국 최고의 근대화가인 小痴 許鍊을 문하생으로 둘

정도로 그림에 뛰어나 불화를 비롯해 다산초당도‘ ”백운동도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초의는 스님으로 일생을 살면서 , , 를 섭렵하며

많은 문집을 남기고 81세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가 남긴 기념관 앞 오석에 새겨진 가 눈에 띤다.

      고향을 떠나 온지 사십 여년 만에 백발로 돌아오니

      마을은 풀 섶에 묻혀있고 옛집은 간대 없네.

 

 

 

초의선사의 시 歸 故鄕첫 구절을 읊조리며 무안을 뒤로하고

다음 가는 코스는 영광. 영광하면 법성포. 법성포하면 굴비백반인데

점심이 끝나고 나니 맘이 바뀌어 다음 기회에 찾기로 하고 백수읍 길용리

원불교영산성지를 답사했다.

 

 

 

 

 

  이곳은 교조 소태산 박중빈이 태어난 곳으로 교인들은 이곳을 성지로

여기고 신성시하고 있다. 소태산은 그가 깨달은 진리를 으로 그려

상징하고 있고 이는 불생불멸의 진리와 仁果報應의 이치를 바탕으로

우주만상이 전개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실제로 성지 경내에는 거대한

 조형물이 새워져있으며 옆에는 소태산이 이곳에서 大覺을 이룬 것을

기념하기위해 萬古日月이란 거대한 비를 건립한 것이다. 지난해 2015년이

  원불교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이었으니 개교 연륜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햇수인데도 이렇게 성장일로에 있는 걸 보면 교세가 눈부시게 확장 된 셈이다.

 

 

 

 

 

 

   영광을 뒤로하고 해변도로를 달려 전라남도 도계를 벗어나니

바닷가에 흐드러지게 핀 해당화가 안녕을 고하는 듯 꽃송이를 마구

흔들어주고 있었다.

 

'내가 쓴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년의 공포 치매, 예방 할 수 있다  (0) 2016.09.20
望海寺 가는 길  (0) 2016.09.06
마곡사, 솔바람길을 걷다  (0) 2016.06.03
돌다리  (0) 2016.05.28
가아 땅, 고령 나들이  (0) 2016.04.22